동장군도 어쩌지 못하는 96세 노익장의 '독도사랑'

신축년 새해 첫 수요일(6일)이다. 선약이 잡힌 날이다. 영하 12도, 오늘도 만만치 않은 날씨다. 하필이면 오늘. 후회막급했지만 약속은 약속이다. 속옷까지 단단히 챙겨 입고 길을 나섰다. 매주 수요일 구 일본 대사관 앞에서 독도 수호 집회를 여는 민경섭 옹을 따라나선 참이다. 오늘이 물경 1084회 차다. 코로나 이전까진 일주일에 3~4차례 집회를 열었다. 많을 땐 몇 백 명이 모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독도수호클럽 간부진 서넛이 일주일에 한 번 연다.

민 옹은 1927년 생이다. 우리 나이로 96세다. 광복과 전쟁과 4.19와 6월 항쟁 등 대한민국 격동의 현대사를 온 몸으로 헤쳐 왔다. 전쟁 통 계엄사령부에서 우연치 않게 공직생활을 시작한 그는 마지막 근무처인 서울시에서 퇴직할 때까지 30여 년간을 나라를 위해 봉직했다. 이젠 그만 쉴 때도 됐건만 그는 지난 2014년 아흔 노구를 이끌고 분연히 다시 일어섰다. 독도를 둘러싼 일본의 수작이 도를 넘어설 때였다. 


1927년 생 민경섭 옹 민경섭 옹의 독도사랑 투지와 열의는 96세의 나이마저 무색하게 한다. 혹한의 날씨에도 그는 독도수호를 외친다..  


당시는 아베 전 일본총리의 극우주의가 극에 달하고 있었다. 국정 교과서나 일본정부홈페이지까지 동원해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했다. 당연히 우리 국민들 사이에선 반일감정이 한껏 고조되었다. 마침 그 해 여름 천 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명량'까지 가세해 일본에 대한 국민적 공분은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었다. 민 옹은 당시 나이 들었다 해서 뒷방에 앉아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은 역사에 대한 죄악이라 여겼다.

"그건 하늘의 명령이었어요. 누가 나가라고 시킨 것도 아니고 함께 하자고 권한 것도 아닌데, 그렇게라도 나가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건 제 나이 스무 살 때(1947년) 고향의 샘 앞에서 스스로에게 한 다짐이기도 합니다."

민 옹의 고향은 김포다. 그 곳의 한 야산에 사철 마르지 않는 샘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만 스물이 되던 해 다른 친구 둘과 함께 당시 극도의 혼란과 도탄에 빠진 대한민국을 위해 한 목숨 다 바치기로 다짐하며 그 샘 앞에서 백일기도를 올렸다고 했다. 그 또한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그가 먼저 친구들에게 제안해서 시작한 일이었다. 그의 지극한 나라사랑은 그때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향천(鄕泉)을 호로 삼은 것도 그 약속을 잊지 않기 위함이었다. 



행동주의자 앞에 등장하는 소중한 인연들
 

일본대사관 현관 앞 시위  구 일본 대사관 앞 소녀상 옆에서 1차 집회를 하고 일번대사관이 입주한 건물 앞에서 2차 집회를 연다. 함께한 독도소호클럽 김영분 대변인
▲ 일본대사관 현관 앞 시위  구 일본 대사관 앞 소녀상 옆에서 1차 집회를 하고 일번대사관이 입주한 건물 앞에서 2차 집회를 연다. 함께한 독도소호클럽 김영분 대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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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행동주의자다. 마음을 먹으면 바로 실천에 옮겨야 직성이 풀린다. 처음엔 소속단체도 없이 혈혈단신 홀로 나가 '독도수호'를 외쳤다. 그가 고문을 맡고 있는 '(사)독도사랑운동본부'나 회장인 '대한민국독도수호클럽' 등은 나중에 힘을 합치거나 새로 만든 단체다. 일면 무모하게도 보이지만 일단 그렇게 시작하면 그에게 새로운 인연들이 다가오곤 했다. 마치 하늘의 계시인 양,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고비 고비에 소중한 사람들이 등장해 손을 내밀곤 했다. 

"대한민국 독도학회 회장인 신용하 교수를 꼭 한 번 뵙고 싶었어요. 그런데 그게 쉽지 않더군요.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도 몰랐고. 그런데 어느 날 후광이 찬란한 태극기가 제게 날아와 안기는 꿈을 꿨어요. 그런데 바로 그 날 오후 신 교수께 전화가 온 겁니다. 우린 그렇게 하늘의 계시를 받아 극적으로 만날 수 있었지요."

일본군의 정신대 문제 해결에 앞장 서 온 박영규 목사와의 인연도 그랬다. 사전에 의도된 바 없이 참으로 우연찮게 의기투합했다. 민 옹과 박 목사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주관하는 "수요집회" 전 보통 11시에서 12시까지 합동으로 집회를 연다. 1부는 정신대 문제 해결, 2부는 독도 수호 및 스가 총리 규탄 집회 형식으로 진행한다. 오랫동안 합을 맞춰 이젠 눈치만으로도 서로 의사소통이 된다.

"어르신 볼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요. 저 연세에 어떻게 저런 힘이 있을까, 저두 이제 70대인데 반도 못 따라간다니까요. 어르신이 연설을 하고 구호를 외치면 이 거리가 쩌렁쩌렁 울려요."

독도수호클럽 김영분 대변인의 전언이다. 그 말은 조금도 과장됨이 없다. 백세를 바라보는 나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 인천 집에서 종로까지 편도만 2시간이다. 그는 그 먼 길을 한 걸음에 달려와 '독도침탈야욕 즉각 포기, 다케시마의 날 즉각 폐지'를 외친다. 서슬이 퍼렇다. 듣는 이의 오금이 저릴 판이다. 그런 그의 존재감은 이미 일본대사관에서도 잘 알려져 있다. 가끔 직원들이 인사할 때도 있고, 연전엔 NHK가 그를 취재해 가기도 했다.

"사실 누구한테 보이기 위해 하는 일은 아니지만 기왕 나라에 좋은 일이니 많이 홍보도 되고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하면 좋으련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관심이 별로 없어요. 언론도 정부도. 심지어 나를 불편하게 여길 수도 있는 일본 방송국도 날 찍어 갔는데 말이죠."

그는 지난 2017년 3년간의 투쟁일지를 정리해 <영혼을 담은 남다른 독도지킴이, 92세 노구의 맹활약상>이라는 책을 펴냈다. 이를 일본어와 영어로 번역해 해외 유수의 기관과 대학 도서관에 기증했다. 일본 NHK와 브라질 켄트 TV에서 인터뷰 해 갔으며 미 캘리포니아 대학 한국학 도서관, 프랑스 파리 8대학 정지학과 등도 그를 찾아 왔다. 집필 당시 인연처럼 나타난 런던 SOAS대학 인류학과의 박정은 박사는 영문 번역을 주도했을 뿐 아니라 여러 외신들과의 인터뷰에 통번역을 지원하고 있다.

"여든이 넘어서 컴퓨터를 배웠어요. 한학을 한 구식사람이라 배우기가 정말 어려웠지요. 눈이 어둡고 손이 따라가지 못해 속도는 느리지만 매주 집회 마치고 오면 그날 일지를 사진과 함께 정리해서 메일로 보내주고 있어요. 수신자가 한 3천 명 쯤 되지요."

문제 메시지나 카카오 톡을 쓸 줄 알면 더 편할 텐데, 스마트폰 자판과 화면이 작아 새로 배우는 게 쉽지 않다고 한다. 주 1회 집회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닌데, 그걸 정리해 3천여 명이나 되는 팔로어 주소를 일일이 입력해가며 e메일을 보내는 건 더더욱 쉽지 않다. 그는 그 작업을 혼자 다 한다. 이제 한글 뿐 아니라 PDF파일도 능숙하게 다룬다. 사진까지 넣어 소식지를 만드는데 출판사 디자이너 뺨치는 실력이다. 옆에서 보고 있어도 믿기지 않을 정도다.

"이제 뭐 있겠어요. 저는 정말 간절히 바라는 대로 일본이 더 이상 쓸데없이 독도로 시비 걸지 말고 우리나라 땅이란 걸 깨끗이 인정하고 과거사에 대해서도 사과하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면 더 바랄 게 없어요. 그걸 받아낼 때까지 싸우는 게 내게 주어진 숙명이고 목숨을 다하는 날까지 지켜야 할 도리겠지요."

요즘 종로의 소녀상 주변은 매우 소란하다. 이념과 정파가 다른 세력들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목소리를 내는 집회를 야유하고 심지어 욕설까지 퍼붓는다. 하지만 민경섭 옹이 마이크를 잡으면 분위기는 사뭇 달라진다. 백세를 바라보는 나이에 오척단구지만 그는 여전히 그렇게 꼿꼿하다. 그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위엄이 서려 있다.